사이클이라는 말 —
반도체의 오르내림에 대하여
오르면 내리고, 내리면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를 수도 있다
사이클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자전거를 떠올렸다. 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가고, 멈추면 넘어진다. 반도체 업계에서 말하는 사이클은 조금 다르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앞으로 가는 구간이 있고, 아무리 밟아도 제자리인 구간이 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어느 구간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 지나고 나서야 보인다.
반도체 산업에는 오래된 패턴이 있다. 호황이 오면 기업들은 공장을 짓는다. 공장이 완성될 때쯤에는 이미 공급이 넘쳐흐른다. 가격이 내려가고, 실적이 나빠지고, 투자가 멈춘다. 그러면 다시 공급이 부족해지고, 가격이 오른다. 이 순환이 대략 2년마다 반복되어 왔다. 시장에서는 이것을 반도체 사이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은 그 패턴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의 사이클표를 꺼내 들고 지금을 맞춰보려 하면 자꾸 어긋난다. 2022년 하반기에 시작된 메모리 불황은 고통스러웠다. 재고가 쌓이고 가격이 무너졌다. 그런데 2024년을 기점으로 흐름이 바뀌었고, 2025년 후반부터는 역대급이라는 말이 기사마다 붙기 시작했다. 2026년 1월과 2월에는 반도체 수출 증가율이 100퍼센트를 넘어섰다.
AI가 이 사이클을 바꿔놓았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과거의 반도체 수요는 스마트폰이 몇 대 팔리느냐, 서버 투자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 수요는 예측 가능했고, 그래서 사이클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AI는 다르다. AI 모델 하나가 쓰는 메모리의 양은, 스마트폰 수백만 대가 쓰는 것과 맞먹는다. 그리고 AI 모델은 계속 커지고 있다.
HBM이라는 물건이 있다. 고대역폭 메모리. AI 반도체 안에 들어가는 특수 메모리다. 일반 D램보다 웨이퍼를 세 배나 더 소모하면서 만들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을 만드는 데 생산 능력을 쏟아붓다 보니, 일반 D램이 덩달아 부족해졌다. 공급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전체가 타이트해지는 구조다. BofA는 2026년 D램 가격이 40퍼센트 더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반도체 시장 규모 전망
시장 성장률 예상
시장 규모 전망 (BofA)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골드만삭스는 HBM 공급 과잉으로 2026년 가격이 10퍼센트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 반도체 불황의 패턴을 되짚어보면 조정의 깊이와 지속 기간이 회를 거듭할수록 커지는 흐름이 보인다. 2015년 하강은 1년 안팎으로 끝났지만, 2022년 불황은 1년 이상 30퍼센트 가까이 밀렸다. 슈퍼사이클이 높이 올라갔다면, 언젠가 내려올 때의 충격도 그만큼 클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차증권은 AI 수요가 역사적 반도체 사이클 패턴을 깨고 6년 연속 성장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전례가 없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정말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아무도 이 끝을 본 적이 없다는 것.
나는 반도체를 잘 모른다. 웨이퍼가 어떻게 생겼는지, HBM이 일반 D램과 어디서 갈라지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이클이라는 개념 자체는 알 것 같다. 계절처럼, 썰물과 밀물처럼, 오르내림이 있다는 것. 지금이 높은 곳이라면 언젠가 내려올 테고, 지금 내려가고 있다면 언젠가 다시 올라온다는 것. 반도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런 리듬 속에 있다.
다만 AI라는 변수가 그 리듬을 조금 바꿔놓고 있는 것 같다. 얼마나, 얼마 동안. 그건 아직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들이 지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고, 그들도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나는 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