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시에서
삽을 파는 사람들
AI 반도체 수혜주를 들여다보다 — 엔비디아 뒤에 있는 이름들
미국 서부 골드러시 때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금을 캔 광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청바지를 판 리바이 스트라우스, 삽과 곡괭이를 판 장비 상인들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뭔가 허탈했다. 꿈을 좇아 서쪽으로 달려간 사람들보다, 그 꿈을 팔기 위한 도구를 판 사람들이 더 안전하게 더 많이 벌었다는 것이 어쩐지 세상의 이치처럼 들렸다.
AI 시대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다. 엔비디아가 주인공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를 공급한다. 그런데 그 뒤에는 더 작고, 덜 알려지고, 그러나 없으면 안 되는 회사들이 있다. 반도체를 테스트하는 소켓을 만드는 회사, 공정에서 쓰이는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회사, HBM을 쌓아 올리는 데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회사. 골드러시의 삽을 파는 사람들이다.
이런 회사들을 흔히 '소부장'이라고 부른다. 소재·부품·장비의 줄임말이다. 반도체 공장이 돌아가려면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생산을 늘릴수록, HBM 투자를 확대할수록, 그 수혜는 이 회사들로 흘러들어온다. 직접 금을 캐진 않지만, 금을 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사야 한다.
이 회사들의 공통점이 있다. 특정 기술에서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갖고 있거나, 대체재가 없거나, 고객사가 바꾸기 어려운 공급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은 한번 공정을 세팅하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 장비를 바꾸면 수율이 달라지고, 수율이 달라지면 돈이 새어나간다. 그래서 이 회사들의 고객사 이탈률은 낮다.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영업이익률 수준
매출 비중 (1Q26)
영업이익률 수준
물론 이 회사들도 완벽하지 않다. 특정 고객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건 칼날의 양면이다. 고객사가 잘 되면 같이 잘 되지만, 고객사의 투자가 줄거나 공정이 바뀌면 타격이 집중된다. HPSP의 경우 고압 어닐링 기술에서 경쟁자가 없다는 게 강점이지만, 그 경쟁자가 등장하는 날이 리스크의 시작이기도 하다. 특허 분쟁이나 기술 변화는 언제든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 회사들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분명하다. AI 인프라 투자는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3년에서 5년, 어쩌면 그보다 더 긴 구조적 흐름이다. 데이터센터는 계속 지어지고, HBM은 계속 더 고도화되고, 반도체 공정은 계속 더 미세해진다. 그 흐름이 지속되는 동안, 삽을 파는 사람들의 장사는 멈추지 않는다.
오늘도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엔비디아 뒤에 있는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뒤에 있는 한미반도체, 그 뒤에 있는 수많은 이름들. 세계는 생각보다 긴 공급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어딘가에 삽을 파는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다.